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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연일읍 우복리(牛伏里)
첨부이미지 (썸네일 - 첨부파일 뿌리기) 옥여봉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본 읍에서 남쪽에 있는 지역이다. 동으로 대송면과 접해있고 도로가 이곳 대송면 남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을의 남쪽과 서쪽은 경주시와 접해 있어 마을을 둘러싼 크고 작은 능선들이 피난지의 제1로 꼽고 있는 곳이다. 본래 영일군 서면직역에 속한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홍사, 사각곡, 홍사를 합병하여 우복리로 연일면에 이속 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중엽에 우복 또는 우노동으로 칭해왔다. 우복(우복1리), 우노, 마을의 지형이 소가 업드려 있는 형국이라 우복으로 불러왔다. 조선조단종사화 때 장낙원 주부를 지낸 노은 김예중이란 선비가 이곳에 피신하여 살면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우복 우노곡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원김씨의 입향조인 예중의 조부인 김상여는 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병마절제사를 지내고 있을 때 단종을 옹호하다가 세조에 화를 당하자 그의 손자인 예중은 모든 것을 버리고 충청도 예산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피난을 하게 된 것이며 농사를 지으며 외부의 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기고, 쌀개실, 우복2리에 속하는 곳으로 1600년대 연일 중단에서 김해김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어느날 도적들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집도 불에 타버리자 이곳에 숨어 들어와 살게 된 곳으로 마을의 모양이 디딤돌 방아의 쌀개와 비슷하여 불러온 이름이다. 홍사, 어원은 작은 골짜기를 따라 몇 가구가 살았는데 마을 뒤의 붉은황토가 있는 골짜기로 붙여진 이름이다. 포항지역에 유일하게 순천 김씨가 이곳에 취락을 하고 있으며 1970년대 전까지 흥행한 마을이 도시화의 변화를 추구하며 이곳을 떠났고 교통이 불편한 곳이다. 쌀개실 서쪽 길가에 큰바위 두 개의 지 석묘가 있는데 옛 전설에는 신라 때 한 장수가 이 바위를 들고 경주에 성을 쌓으려고 가다가 성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 우복(牛伏.愚伏).우노(愚老,牛老)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연오랑 세오녀가 왜국으로 떠나 버리자 신라 땅에는 해와 달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왜국에 연오랑과 세오녀를 찾아갔던 사신이 대신 가져온 세오녀의 비단옷으로 제사를 올렸더니 해와 달이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이 때 광명이 비치는 한 가운데에 위치하였다 하여 중명(中明)이라고 불렀다 한다. 중메골 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보가 경주시와 포항시의 경계이며, 이 경계로 한 마을이 행정구역을 달리하게 되었다. 영일 중메골로 따로 부르기도 하며, 통신시설은 경주시의 것을 이용하나 생활권은 포항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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