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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 죽장면 입암리(立岩里)
첨부이미지 (썸네일 - 첨부파일 뿌리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솔안, 큰마을, 골안을 1리로, 장터, 구장터, 명미마을을 2리로 나누어 입암이라 통칭하였다. 면소재지이다. 
 
 
○ 솔안마을[松內洞] 
마을 앞에 200여년 느티나무 대여섯 그루가 가사천변에 남아 있고 물가에 20m 높이의 선바위가 하나있어 입암(立岩)이라 부른다. 송림 울창한 언덕에 여헌 장현광 선생을 주향하고 있는 지방기념물 70호입암서원(立岩書院)과 400여 년생 향나무(높이 15m,가슴둘레 3m)와 300여 년생 은행나무 (높이 13m, 가슴둘레 4.2m)가 있으며, 입암 바로 옆에 일제당이 있고, 서원 우측에 여헌 장현광(旅軒張顯光)선생의 처소였던 만활당(萬活堂)이 있다.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선생이 지은시조 입암이십구곡(立岩二十九曲)이 전해지고 있다. 임란 때 권극립(權克立) 선생이 피난차 들어와살게 되었는데 그 증손자대에서 평지(平地)마을(큰마을)을 일구었고, 같은 시기에 이천서씨(利川徐氏)가 골안에 정착, 골안마을을 일구었다 전한다. 솔안마을에는 지통(紙通;종이공장)이 있었으며,1960년대 초까지 만해도 鄭柄煥씨가 황모(黃毛)와 장액(獐腋)의 고운 털로 만든 붓이 유명하였다.서원 뒷 마을을 별도로 서원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월보름에 4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에서제사를 지낸다. 
 
 
○ 큰마을 
장터, 구장터마을과 합동으로 단오날 외당(外堂;큰마을 어귀 400여 년생 느티나무)과 내당(內堂; 400여년생 느티나무)에서 동제를 지낸다. 1907년 산남의진의 입암전투 때 일본수비대의 만행으로 많은 가옥과 고서들이 소실되었다 한다. 동와권공유덕추모처(東窩權公遺德追慕處)인 오로정(吾老亭)과 참판동봉권공숭봉지처(參判東峯權公峯之處)인 영모당(永慕堂)이 있으며 관공서로는 면사무소, 죽장파출소가 있다. 
 
 
○ 장터 
큰마을 들머리에 구장터가 있고 이곳에는 죽장초등학교(1931년 설립)와 입암교회, 면민복지회관, 우체국이 있다. 면소재지가 확장됨에 따라 시장이 협소하므로 1940년경 합류대(合流台)라는 거대한 바위를 제거하고 하천을 정리하여 새로운 장터를 마련하여 생긴 마을이다. 죽장중· 고등 학교뒤에 산남의진발상기념비(山南義陳發祥記念碑 ; 1985년 건립)가 있다. 
 
 
○ 명미마을 . 명뫼마을 . 명리(鳴里) 
서편 산록에 형성된 산촌이다. 이름난 묘터가 있다는 뜻으로, 혹은 부근 공동묘지에서 우는 소리를 많이 들어 지어진 지명이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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