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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 기계면 성계리(星溪里)
첨부이미지 (썸네일 - 첨부파일 뿌리기) 1914년 칠성(七星)과 화계(花溪)의 각 1자를 취합하여 성계리라 하였다.자연부락으로 1리에 아인골, 2리에 화계, 화당(花堂), 방구뱅이, 싯집매가 있다.  
 
○ 아인골,칠성동 
300여 년 전 신유효(辛裕孝)란 선비가 노당제-칠성현(七星峴)-로 넘어가는 길목 골짜기에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 현재의 위치로 이주해 오게 되니 고인돌인 칠성암이 마을 속에 들게 되어 칠성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 형성된 마을은 안인(安仁)골이라 했는데 발음이 변하여 아인골 이라하며 편안히 어질게 살아가는 마을이란 뜻이라 전한다. 성강사(星岡祠)가 있었는데 대원군때 철폐되었다가 화대리에 재건되어 있으며, 느타리 버섯재배로 소득이 높다. 옛 마을어귀 팽나무 당산목에서 정월보름날 동제사를 지낸다. 
 
○ 화댕이,화당(花堂) 
처음 10여 호 살 때 살구꽃이 피면 꽃 속에 집들이 묻힌 듯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한다. 지금은 싯집매 마을과 연결된 큰 마을로 변천하였다. 하천 제방에서 화당 숲에 이건된(1998) 수리계장이 종인유공비(水利契長李種仁有功碑)가 있다.  
 
○ 화계(花溪)  
월성김씨가 300여 년 전 개척한 마을로, 산에서 흐르는 개울가에 아름다운 꽃나무가 많던 마을이라 화계라 했는데, 지금은 변음되어 회계라 한다. 30여 호 살고 있다. 축산단지로 조성되어 소득이 높으며 성계지와 당산목이 있다.  
 
○ 방구뱅이,방구백이 
큰 바위(고인돌 3기)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이 바위는 1956년 성계교회가 설립되면서 파손되고 그 파편 바윗쪽 두개가 남아 있다. 2리에서는 3-4년 전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 싯지배 
싯집('세 집'의 방언)이 모여 산다고 붙인 마을명으로 현재는 10호가 산다. 마을 앞 들의 경지 정리가 1985년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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