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 제목, 작성자, 작성일, 첨부파일, 내용을 볼 수 있는 테이블입니다
북구 흥해읍 남송리(南松里)
첨부이미지 (썸네일 - 첨부파일 뿌리기) 1914년 남대동(南大洞), 송동(松洞), 남휴동(南休洞), 서원동(書院洞)을 합하여 남송(南松)이라 하였다. 
 
○ 마들 
남송 1리에 해당하며, 해방후에 조성된 마을로 작은 하천을 경계로 성곡리와 나뉜다. 흥해읍성과 수군만호진기(水軍萬戶鎭基)였던 두무치(두호동)와의 주도로가 이 마을과 새터 사이를 지났다. 말이 사육되는 곳이었기에 불리워진 지명으로 추측된다. 의송교회가 있다. 
 
○ 새터·남휴동(南休洞) 
1리로 250여 년 전 김해김씨가 마을을 일구었다 하며, 해방 후 새로이 커진 마을이 되었다 하여 새터라 불렀다 한다. 흥해군수가 부임할 때에는 그 외 두무치나 읍성을 오가는 관리들이 이 마을에서 쉬어 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남휴 동이라 했다 한다. 한동어린이집(1996년 개원)이 있고, 송림 속 제당에서 6년 전까지 동제사를 지냈다. 
 
○ 송동(松洞)  
2리로 소나무와 관계되는 지명은 난을 무사히 피할 수 있다는 속설에 따라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서 월성박씨와 월성최씨가 개척한 마을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난을 무사히 피했다는 기념으로 마을 어귀에 솔씨 10개를 심은 것이 자라나 지금은 아름드리 소나무로 변해서 풍치를 자랑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일제시대에 지게로 흙을 쳐서 막은 3,000여 평 규모의 못이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마을 사람들이 쉽게 타지로 떠나지 못하도록 40여 년 전에 소쿠리 입구에 해당하는 이 못 둑에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고 한다. 15년 전까지 정월보름날 동제사를 지냈다. 송림사가 있다. 
 
○ 짓댕이(池塘) 
3리로 못 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지당(池塘)이라 했다고도 하며, 주위의 토질이 비만 오면 몹시 질컥거리는 질땅이란 뜻으로 짓댕이(池塘里)라 불렀다 한다. 마을 앞에 2,000여 평 규모의 못이 있고 못 앞 야산 뒷자락에 두산 포도농원이 있던 자리에 한동대학교(1995년 개)가 들어서 있다. 뻣재말랭이 또는 막재말랭이라는 언덕에서 정월보름에 달맞이를 했다고 한다. 마을 서쪽 흥해안들 방향에 일제시대에 조성한 4000여 평의 아랫 못(일명 관답 못)이 있고 그 바로 앞에 구갈밭(蘆 田坪)이라는 들이 있다. 일제시대에 개간한 들이다. 주변에 배밭이 많다. 
 
○ 서원마을 
3리로 임란창의공신 정삼농(鄭三農)이 서원을 창건하였던 마을이다. 지금은 5호가 살고 있으며 곡강 최씨 재실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서쪽 산록(사모산, 鰲山) 개머리 끝에는 곡강최씨 시조 곡강 부 원군 최호(崔湖)의 묘가 있다. 이 마을 북쪽 곡강 어귀에 있던 분뇨종말처리장은 북미질부성 동남쪽 산밑으로 옮겨갔다. 3리로 사모산(鰲山)과 남대실 사이에 있는 골짜기를 무심골이라 하는데, 사모산 동북 산자락의 곡강 양수장 바로 옆 자연석에 충비순량비(忠婢順良碑)가 있다. 이 비(碑) 바로 앞 곡 강천 건너편 북미질부산성 벼랑의 두 개의 바위 사이(간격 30㎝,깊이5m)에 상반신만 있는 3기의 부처가 있다.  
 
○ 남대실(南大洞) 
3리로 남송리의 중심 마을이다. 터주는 월성이씨다. 동제사는 섣달에 택일하여 지내고 있다. 1960연대에 마을 뒤 야산 규조토 속에 다량의 고래 척추뼈가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사모관대(紗帽 冠帶)를 한 모습의 사모산이 있고, 산남의진 참모장 정순기(鄭純基)의 묘가 있다. 1963년 9월 1일자 로 개교하여 졸업생 810명을 배출한 흥해초등학교 남송분교는 1994년 3월 1일자로 폐교되었다.
  • 태그 남송리
  • 조회 5505
  • IP O.O.O.O
  • 저작자표시-변경금지 저작자표시-변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