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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 청하면 고현리(古縣里)
첨부이미지 (썸네일 - 첨부파일 뿌리기) 까치고개 [작현]와 별래재 [별내현, 성현, 장자봉 181m]를 잇는 7번국도의 서편 일원에 고현1리와 2리(하방, 이장곡, 배곡)가 있다. 1914년 네 개의 자연부락을 합하여 중심부락의 이름인 고현으로 통칭하였다.  
 
○ 고현·고천하리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 해아라 개칭하고 화방의 앞 들에 토성을 쌓아 현기를옮겨와 수백 년을 있다가, 고려 현종조에 덕성리로 옮겨가니 그 자리 부근에 형성된 마을을 화방과 구분하여 고현 혹은 고청하리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고현원이 원뒷들 남쪽에 있었으며, 청하군 당시에는 남면사무소가 있었다. 서편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건지봉이 있어 곤지봉 혹은 달봉만디라 부른다. 지씨터주와 곽씨 골목 신위에 동제사를 지낸다. (정월보름, 말채나무 당산목, 제당유)  
마을 속에 경수정(곽씨문중)이 있고 옛날 별래재를 넘어가는 길목 후동봇가에 있던 포산곽공시은비가 이 마을 진입로변에 옮겨 세워져 있다. 그리고 원뒷들에 김해김공두수공적비가 있다. 서편산록에 고현교회가 있다. 
 
○ 하쌍·화방·하방(河芳)·하방(河坊)  
배골에서 흘러내리는 하방천이 이 마을 중심을 흐르며, 옛날에는 이 안골짝으로 배나무 또한 많았던 고을이라 배꽃 만발한 풍경을 보고 그렇게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이 번창했던 조선조 후기에 이르기까지 달봉산 [망월봉] 동남 들녘에 넓게 주택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절도 있었다 한다. 달봉산과 작현 서편 및 개축 일원에는 6∼7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석실고분 백수십여기가 있어 이 일원이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면서 문물이 크게 번성했던 고을임을 입증하여 준다. 
 
○ 배골·이곡·이화동 
매봉 (172m)과 달봉산 사이의 배나무밭이 많았던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고려 때 남계부곡이 있었다. 인조(1628) 때 부제학 유축이 송라 학산 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7년을 살다가 형조참판으로 재등용되어 떠났으며, 달봉산 북쪽에는 당시에 밤낚시를 즐기며 노닐다가 밝은 횃불의 정취에 감탄하여 못 이름을 지었다는 어화지가 일부에 남아 있어 못안못이라 부른다. 
 
○ 이장곡 
고주산 [해발 348m, 고주봉산이라 했으며 내륙으로 연결되는 봉화산이었음] 동편 깊숙한 골짜기에 형성된 촌락이다. 1958년 만수면적 8.46ha의 고현지가 축조되어 있으며, 배나무밭이 많고 골짜기가 깊은 산촌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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