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 제목, 작성자, 작성일, 첨부파일, 내용을 볼 수 있는 테이블입니다
북구 청하면 유계리(柳溪里)
첨부이미지 (썸네일 - 첨부파일 뿌리기) 청하천의 발원처인 궁곡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을 따라 덕성산과 호학산 줄기가 형성한 큰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유천, 황배이, 서계와 같은 자연부락이 있으며, 1914년 유계리라 개칭하였다. 상옥으로 가는 샘재 굽앗길이 서계마을을 돌아간다.  
 
○ 유치이·유천 
마을 앞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았을 때 유천리라 하였으며, 마을 윗돔에 흘러 넘치는 샘이 있어 유천이라 하니 이에 연유하여 유천리라고도 불렀다 한다. 이 마을 북쪽으로 활 모양의 계곡이 펼쳐지는데 궁곡, 활골이라 부른다. 궁곡에는 한때 신라군의 궁노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골짝 깊숙이 자리한 절터 혹은 탑골이란 곳에 탑산사가 있었다 한다. 1953년 이 골짜기의 물을 용두현 넘어 회학지로 끌어넣기 위하여 궁곡수로동굴을 뚫었다. 용두현에는 이여송이 혈을 자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마을 어귀 상수리나무 당산목엣 정월보름날 문씨 터주신위에 동제사를 지낸다. 
 
○ 황배이·황암리 
황배이골 어귀의 바위가 누른색인데 연유한 지명이다. 월성최씨 집성촌이다. 광산골에는 조선조에 이동신공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서 한때 비스무스 광산이 있었다. 여기서 골짝 깊이 들어가면 상사바위 입구 기암절벽 사이에 성문과 같이 틔어진 곳이 있어 위명동이라 부른다. 임란 때 이 안골에 피난하고 있던 주민들이 이곳에는 위병을 돌과 바위로 무찔러 쫓으니 울며 달아났다고 하여 위명동이라 불렀다 전해진다. 이 안골 깊은 곳에 1943년 법성사가 건립되어 있는데, 이 절터에는 나대의 절 황방사가 있었다 한다. 청하면의 농업용수 학보를 위한 유계저수지가 축조중인데 완공되면 유천·황암은 수몰지구가 된다. 
 
○ 서계리  
이 고을의 서쪽 계곡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조선 명종 원년(1545) 을사사화 때, 황해감사로 있던 윤상문이 이 고을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지명이라 전한다.마을 앞 하천 바닥에 돌이 많아 물이 바닥으로 스며들어 버리니 일명 건천동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 북쪽에 7호 정도 살고 있는 중리란 마을이 있고, 그 안골짜기 월곡에 금광이 있었다 한다. 마을 동편 하천변에는 오리에 뻗친 풍치림이 있었는데 일제말기에 자력갱생사업의 명목으로 대부분이 벌채개간되고, 1,000여 평에 50여 그루의 노거수가 남아 있다. 500년생 느티나무 당산목(가슴둘레 6m)은 도목으로 보호되고 있으나 고사 직전에 있다. 정월보름에 모씨터주 윤씨골목 신위에 제사를 지낸다.이 마을 남쪽 들에 1917년 건립된 유계교회가 있고 서편 대밭 아래에 윤백주와 그의 자 윤빈을 기리는 상덕사와 죽림사가 있다.
  • 태그 유계리
  • 조회 5435
  • IP O.O.O.O
  • 저작자표시-변경금지 저작자표시-변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