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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대송면 남성리(南城里)
첨부이미지 (썸네일 - 첨부파일 뿌리기) 넓은 중보들과 좌비봉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로 구연일읍성이 있었으므로 남성이라 불렀다.성좌동 (聖佐洞) 현 남성 2리 .남성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신라 오량지현 때 향교구지라고 하며 성인을 안좌시켰다는뜻에서 성좌동이라 불렀다.  
그후 향교는 고종 4년(1867년)연일 효자동으로 옮겨 갔고, 1997년 3월에는이 마을에 대송중학교가 신설되었다.남성(南城) 고려 현종 2년 (1011)토성으로 축조하였다가 붕괴되자 공양왕 2년 (1390)에 돌로 고쳐 쌓고감무겸 만호를 ,조선 태종 때에는 병마사 진을 두었다.  
당시 성의 둘레는 2,940척, 높이는 12척이었는데 영조23년 (1747) 읍을 고읍리(古邑里)로 옮겨 갈 때까지 736년간 연일현의 소재지였다.  
읍이 옮겨간후 황폐화 되어 지금은 석축이 완전히 남아 있는 부분이 북쪽 500m정도이다. 
잔디묘역에는 고려 정습명(鄭襲明)의 묘단이 있어 음력 시월 초여흘에는 영남의 영일정씨 후손들이 모여 묘제를 지낸다 
 
○ 성좌동 
현 남성 2리 .남성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신라 오량지현 때 향교구지라고 하며 <성인을 안좌시켰다>는 뜻에서 성좌동이라 불렀다. 그후 향교는 고종 4년(1867년)연일 효자동으로 옮겨 갔고, 1997년 3월에는 이 마을에 대송중학교가 신설되었다. 
 
○ 남성 
고려 현종 2년 (1011)토성으로 축조하였다가 붕괴되자 공양왕 2년 (1390)에 돌로 고쳐 쌓고 감무겸 만호를 ,조선 태종 때에는 병마사 진을 두었다. 당시 성의 둘레는 2,940척, 높이는 12척이었는데 영조23년 (1747) 읍을 고읍리 (古邑里)로 옮겨 갈 때까지 736년간 연일현의 소재지였다. 읍이 옮겨간 후 황폐화 되어 지금은 석축이 완전히 남아 있는 부분이 북쪽 500m정도이다. 잔디묘역에는 고려 정습명(鄭襲明)의 묘단이 있어 음력 시월 초열흘에는 영남의 영일정씨 후손들이 모여 묘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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