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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 흥해읍 덕성1리
첨부이미지 (썸네일 - 첨부파일 뿌리기) 포항시로부터 효 시범 마을로 지정된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성 1리는 예로부터 예와 덕을 중시하는 충절의 고장으로 덕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덕실 마을로 불려지고 있다.  
 
흥해 읍내에서 북서쪽으로 6km지점에 높지도 낮지도 않은 겹겹의 산을 지나면 널찍한 평야 지대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에 청아한 개울물 소리와 함께 덕실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전체는 배산임수의 모양을 하고 있어 사대부의 절개를 위용하는 듯하고, 대나무밭이 마을 좌측을 감싸안고 있어 한 눈에 보아도 충절의 혼이 깃든 마을임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샘물은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으며 조선시대에 방방곡곡에서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내고 식수가 없어 고통받을 때도 덕실은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서 물걱정은 없었으며, 인근 마을에서는 덕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샘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회자하였으므로 덕실 마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덕실 마을은 신라 철종왕(505)때 퇴화현에 속한 후 퇴화군에서 의창군으로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고려 초에 이르러 흥해군이 되었으며, 1789년에야 비로서 북상면 덕곡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조선 후기에 와서 덕곡동과 장성동이 합해져 덕성동이 되었으며, 1995년 영일군과 포항시가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안씨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일 먼저 안씨가 마을에 들어와 정착하였으며, 조선 초기(1492)에 경주 김씨가 입향하였고, 경주 이씨는 조선 선조 임진년(1592)에 청송군 안덕면에서 휘(諱) 준(濬)字 분께서 이곳으로 입향하여 터를 닦았다. 이후 500여년 동안 주성(主性)인 경주 이씨, 경주 김씨, 영천 이씨, 곡강 최씨, 선산 김씨, 달성 서씨와 함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유적으로는 경주 이씨 덕실 입향조를 추모하는 이상제(履霜齊)와 담화정(湛和亭)이 있다. 이 곳은 당대 선비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그들의 학문은 수준이 매우 높아 인근의 달전, 흥해, 기계, 청하지역의 재지사림(在地士林)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기도 하였다. 지금도 많은 고서가 소장되어 있는데 이 자료들을 통해 당시 유학자들의 학문의 경지를 엿볼 수 있으며, 덕실마을의 유풍이 동해안 일대의 유림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또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에 성황신, 터주신(경주 김씨), 골목신(경주 이씨) 신위에 제를 올리는 제당이 있는데, 영일군사에 의하면 1642년에 동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마을의 안위와 마을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제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오래전부터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로부터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지키려고 노력해온 것을 알 수 있으며 건물은 목재 와가로 되어 있던 제당을 현대식 건물로 개보수하여 지금까지도 변함었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덕실 마을은 교통의 중심지로 조선후기 철종(1860)때에는 북동쪽으로 장터재를 지나 청하, 영덕으로 통하였고, 남서쪽으로 탑골재를 넘어 신광, 안강, 경주로 통하였다. 또 북서쪽으로는 마북, 상옥, 청송으로 연결되었는데 골짜기가 깊은 배미재가 있어서 행인들이 재를 무사히 넘기 위해 재밑에서 돌을 준비하여 성황당에 던지고 지나다녔는데 그 돌무더기가 집채만큼 컸다고 한다.  
 
덕실 마을은 이런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어 1890년 이전에는 지역 경제의 중심역할을 한 읍내장, 여천장을 개설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흥해평야의 농산물과 동해안 해산물의 내륙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지역 특산물인 모시, 삼베 등과 풍부한 임산물은 마을 경제 기반에 있어 중요한 물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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