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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 청하면 덕성리(德城里)
첨부이미지 (썸네일 - 첨부파일 뿌리기) 고려 8대 현종 9년(1018) 지금의 성터에 토성을 쌓아 하방에 있던 현기를 옮겨오고 덕성 현이라 하였다. 이에 연유하여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에 향교골, 핑이골, 비달골, 동문걸, 서문밖, 덕성과 같은 자역부락을 합하여 덕성리라 통칭하였다. 성터에는 청하초등학교, 면사무소, 농업기반공사 청하출장소, 보건소와 같은 공공건물이 자리하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보전되어 있던 일체의 건물들이 한일합방 이후부터 하나 둘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해방이 되자 완전 철거되고 새마을사업이 시작되면 석축마저 대부분 허물어 없어지고 그 흔적만이 일부에 남아 있다. 성터에 남은 유일한 노거수는 400여 년생 회화나무(10m X 4.9m x 10m)이다. 성의 규모는 둘레 614m, 높이 3m∼9m, 두 개의 성문과 성문루가 있었고, 두 개의 샘이 있었다.  
 
○ 동문걸·동밖 
덕성동문 밖에 형성된 마을로서 주로 상가를 이룬다. 우체국, 농촌지도소 청하농민상담소, 제일교회(1914년 서문 밖에 설립되었다가 1959년 이건)가 있다. 성터에서부터 이 거리에 이르러 청하장이 섰는데 5.16이후에 새장터로 옮겨졌다. 
 
○ 서문밖·섬밖 
덕성서문 밖에 형성된 마을로서 지금은 비달골과 연결되어 있다. 소위 치도길이 7번 국도가 포항, 영덕간에 뚫리기 이전까지 경주, 대구, 서울로 가는 주도로가 연결되던 곳으로서 금은방은 물론 각종 점포가 있었던 지역이다. 
 
○ 비달골 
원래는 현재의 위치보다 서쪽 골짜기에 있던 마을인데 비달먹다[비루먹다]라는 어원에서 생긴 지명이라 전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부락이었기에 생겨난 지명이라 보여진다. 
 
○ 핑이골 
빙골이란 뜻으로서, 덕성1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인데 성이 축조되기 이전부터 형성된 촌락이라 전한다. 옛날 바다에서 큰 거북 한 마리가 여섯 마리의 새끼 거북을 이끌고 이 마을에 올라와 살았는데 그 후부터 마을이 번창하였다 하며, 해마다 정월보름이면 제당에서 이 일곱 거북신위에 정성껏 제사를 지낸다. 성의 동편 골짜기에 위치하며 그늘진 곳에 빙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는 빙판이 생겨 잘 녹지 않으므로 빙골이라 하였던 것이 핑이골로 발음이 변천하였다 한다. 
 
○ 덕송 
동문걸의 큰길 건너 동편에 노송림이 울창하여 덕송이라 하였는데 차츰 마을이 형성되었다.  
저자걸이 있고 덕천리에 이건해 온 청하침례교회가 있다.  
 
○ 교동 
향교가 있어 향교골, 교동이라 불렸으며 2리에 속한다. 월성이씨의 집성촌으로서 골원님의 사저와 아전사속들의 사택 등 고급주택들이 즐비하던 마을인데, 대부분의 골기와집들은 없어졌으며, 향교 앞에 송암정봉용추념비가 있다. 이 마을은 동제를 용지라는 옛 마을터(이 마을 서쪽 5리)에 있는 제당에서 지내고 있으며, 이 마을에 이주해 온 주민들 다수가 용지마을 주민들이고 덕성이 축조된 후 마을이 없어졌다 전한다. 용지는 일명벌지라고도 했으며 [둘레 일만 삼백자] 이 북편 억던에 사직단이 있었는데 1914년 철거되었다 하며 그 대신 청하초등학교 교정에 신사를 세웠다 한다. 구 청하지서 터 서편에 월성이씨 가문의 정여각이 있었는데 6.25때 파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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