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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 청하면 명안리(鳴安里)
첨부이미지 (썸네일 - 첨부파일 뿌리기) 엿재 북쪽으로 트인 골짜기에 형성된 안심, 명안, 정말과 같은 마을을 합하여 1914년 명안리라 하였고 1·2구로 나누었다. 마을 어귀에 있던 월성이씨 문중묘역인 안심을 베어내고 1971년 유역면적 850ha의 안심지를 축조하였다. 이에 배바우 마을도 이주를 하여 가고 2호만 남아 있다. 배바우는 못가에 남아 있으나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많이 묻어 버렸다. 옛날 이곳에 바닷물이 차 있을 때 배를 정박시키던 곳이었다 한다. 고려 때 간천부곡이 있었다.  
 
○ 명안리  
마을 서편 1㎞ 거리에 초가삼간 크기의 움푹패인 구멍바위가 있는데 어느날 한밤중에 얼음장 깨어지듯 울었다 하여 불리운 지명이다. 아주신씨와 월성김씨 세거마을이며 정월보름에 300여 년생 떡갈나무 당산목에서 동제사를 지낸다. 달성서씨 터주와 남평문씨 골목신위를 모신다. 
 
○ 안심리 
안심계곡 어귀에 위치하며 안심지가 안수시엔 마을 앞에까지 못물이 출렁인다. 30여 년 전까지 안심이숲이 마을 앞에 가로막아 있어서 외부에 마을이 노출되질 않아 잦은 왜구의 침입이나 전란에도 안심하고 숨어 살 수 잇는 곳이라 하여 안심리라 불렀다고 한다. 서쪽 1.5㎞ 거리엔 폭포가 있고, 그 안골에 절골 혹은 절터바탕이란 곳에 나대의 절 안심사가 있었는데 빈대 때문에 폐사되었다 한다. 여기서 장구재를 넘어가면 신광의 마북에 닿는다. 정월대보름에 월성김씨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당산목은 고염나무이다. 
 
○ 점마을 
엿재로 넘어가는 길가에 형성된 마을로서 예부터 옹기굴이 있어 그렇게 부른다. 엿재는 한때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던 국경지대였다 전하는데 호랑이나 산도적이 무서워 열 명이 모여서야 넘어 다닐 수 잇던 곳이라 하여 열재라 부르던 것을 발음이 와전되어 엿재라 한다. 삼짇날 300여 년생 적송 당산목(22m × 4.1m ×15m)에서 동제사를 지낸다.(김해김씨 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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