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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송도동(松島洞)
첨부이미지 (썸네일 - 첨부파일 뿌리기) 송도동은 동쪽으로 포항송도해수욕장을 서쪽으로 송도교 밑을 흐르는 형산강 지류를, 남쪽으로 형산교 아래를 흐르는 형산강 하류를, 북쪽으로 항구동 내항을 경계로 하는 4면이 바닷물과 강물로 둘러싸인 섬마을이다.  
 
이 때문에 송도는 이 고장에서 가장 늦게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송도는 본래 조선시대 후기 때(1832년) 迎日縣 邑內面 松亭里에 속한 지역으로서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못하다가 1800년대 말경부터 송정 1동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곳의 땅을 개척하여 살기 위해 한 두집 입주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그 후 1914년 3월 1일 府郡面 통폐합이 실시되어 延日郡 東面에서 迎日郡 大松面 松亭2洞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고, 1917년 浦項面이 指定面이 되어 면세가 신장됨으로써 인근 지역인 이곳에도 1920년대에는 20호 정도로 거주호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어 송도면이 1931년 송도읍으로 승격되었을 때 70여호를 형성하게 되고, 1931년 兄山江改修工事가 착공되자(1935년 준공, 이때 兄山橋도 이루어짐) 松亭2洞은 大松面 松亭里 구역에서 분리되어 포항읍 向島洞이란 명칭으로 새 洞里로 탄생하게 되었으며, 1945년 해방이 되어 왜식동명 개칭이 松島洞이란 새이름을 붙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도는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가운데 큰 길을 중심으로 남쪽마을을 웃각단(현 사무소 건너 송도중과의 사이지역) 북쪽 마을을 아래각단(현 송도탕 서쪽 부근지역으로 옛날 우물이 있었던 곳 주위)이라 불렀으며, 이로써 나중에 웃각단을 송도 1구지역, 아래각단을 송도 2구지역으로 구분지어 동행정을 보게 되었다 한다. 
 
1925년경 웃각단에 영일 鄭氏를 비롯하여 7~8호, 아래각단에 김해 金氏와 순흥 安氏를 중심으로 10戶 가량 거주하며 조개잡이, 노동, 밭농사로 생활을 영위하는데, 松島지역의 일부에 불과한 기존의 밭에 참외, 수박 등을 재배하고 지대가 약간 높을 곳에 호밀, 보리 등을 갈았다 한다. 
 
이같은 영세성의 송도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日人 대지주 大內治郞이 1911년 松島白砂場 不毛地 53여정보의 國有地를 대여받아 造林사업을 전개한지 십수년이 지나 송림이 울창해져 1929년 漁附保安林으로 지정되고, 이어 1931년 송도해수욕장이 개장되고 기준 마을 사람과 새로 입주한 동민들이 여러 곳의 불모지를 개간하여 시금치, 지나채(시나나빠), 파 등을 심기 시작하였고 1930년 후반에 東海岸에 청어, 정어리가 많이 잡혀 청어등 택(身欠練) 공장과 뒤이어 정어리 油脂공장이 松島橋(1934년 최초의 木橋 세워짐) 동편 길 양쪽에 설립되고, 松島 북단에 村土, 熊本, 濱田조선소와 송도교 동북편(현 삼일이사짐세터자리)에 朴相高조선소가 세워지면서 부터이다. 그리하여 당시 웃각단에 40여호, 아래각단에 60여호 정도로 동민이 늘어나게 되었다. 
 
松島의 특성으로는 염전, 해수욕장, 시금치 재배를 들 수 있다. 염전은 송도의 아래 각단을 중심으로 한 부근지역에 형성되어 이 지역을 소금굽는 마을이라하여 일찍부터 염동골(염둥골, 염등골)로 불려져 왔으며 일제 시대를 거쳐 해방직후까지만 해도 딴 봉(형산강 하류를 접하고 있는 송도동의 남단지역)에 2만평, 송도교 건너 강가 양편(청어등택공장과 정어리 공장이 폐쇄된 자리)에 15,000평, 그리고 큰 길 북쪽에 3 ~ 4곳에 소규모의 염전이 있어 소금을 구었으나 6.25직후 생산단가가 높아지고 값싼 천일염이 유통되면서 재래식 제염업은 도산 우기에 처해져 1950년 후반 정부에서는 專賣署를 통해 제염업자에게 轉業보상금을지급하여 제염업자의 전업을 종용할게 될 때 포항의 제염업은 문을 닫게 되었다. 
 
송도해수욕장은 白砂松林의 땅으로 동해의 푸른 파도가 밀어치고 평평한 모래사장에 기러기가 짝지어 평화롭게 내려앉은 모습(平沙落雁)의 장관을 이루는 포항의 명승지이다. 포항의 방풍림인 송림을 지나 전개되는 송도해수욕장은 물이 맑고 모래가 고르고 고우며, 모래사장의 폭이 70m 정도로 넓고, 또한 간만의 차이가 거의 없으며 수심이 멀리까지 얕아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곳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浦項邑이 승격된 해(1931년) 송도해수욕장이 개장되어 시설물을 갖추면서 북한의 원산해수욕장과 함께 남한의 포항해수욕장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광복후에도 포항송도해수욕장은 그 명성과 함께 번창하며 전국 각처에서 해수욕장이 몰려와 포항발전에 큰 몫을 차지해 왔으나 1968년 이후 이 고장에 철강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그 명성과 형태를 잃어가고 말았다. 
 
현재 송도해수욕장 번영회는 1959년에 결성되었고 이후 가건물이 들어섰다가 1964년부터 점차 지금의 건물로 변경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고, 현재는 15호 정도의 상가로 해수욕장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니다. 
 
송도는 이제시대부터 시금치, 지나채(시나나빠) 등 채소를 심어서 포항 주민들에게 공급하기 시작하여 해방이후에는 전 동지중고 서편 부근의 대규모 시금치 단지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지나채, 양파, 무,배추, 참외, 수박, 오이 등의 밭작물을 재배하여 포항은 물론 타지역에 까지 판매를 하였는데, 특히 시금치와 양파는 1950년 후반부터 차량으로 서울까지 출하할만큼 생산이 활발하였다. 
양파는 具千浩씨(72세)가 禹長春박사 연구팀의 권유로 種子를 받아 송도에서 2년간 재배시험한 결과 성공하여 1955년경부터 양파 재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다. 
 
송도에는 일제시대부터 洞祭를 지내오고 있다. 1920년대 웃각단이 30여호나 되자 현 새마을 유아원의 남쪽 큰 길을 건너, 100m 지점의 작은 흙더미 언덕에 팻말을 세워 음력 1월 14일 洞祭를 시작하여, 1946년 현 마을금고 자리에 마을 회관을 짓고 그 바로 앞에 松島祭堂을 세웠다. 
 
그 후 6.25때 마을회관은 재가 되었으나, 祭堂 3은 울타리만 타고 몸체는 그대로 성한 사실을 신기하게 여겼으며, 1951년 마을회관을 크게 다시 짓고 洞祭堂을 현재의 자리에 옮기고, 마을회관은 그 후 改修되어 송도동 사무소가 되어 사용되어 오다 1989년도 현재 동사무소의 자리로 옮겼다. 
송도동에는 6.25때 전사한 미해병 제1비행사단 장병의 넋과 포항을 사수한 수도사단의 전공을 기리기 위한 反共遺蹟碑가 2개(「美海兵第1飛行團戰歿勇士忠魂碑」「포항지구전투전적비」)가 코모도포항비취호텔 맞은 편에 서있다. 
 
2009년 2월 현재 송도동 7,847세대, 인구 20,109명으로 포항에서 인구가 많은 마을로 변모하였다. 
 
현재 송도동에는 송도초등,송림초등, 송도중, 송도시장, 송림시장, 농협송도지점, 포항어린이집, 남부경찰서송도지구대, 포항기상대, 코모도포항비취호텔을 비롯한 다수의 숙박업소, 向島造船所(1945년 金春生 설립), 동성조선철공(주), 송도해수욕장의 여러 횟집 등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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